세 달 동안의 기다림

세 달 동안의 기다림

저는 그 기쁜 성탄 대축일의 오후를 눈물로 지내고, 가르멜 수녀들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쇠창살 문을 열자, 제 이름이 새겨진 공을 손에 들고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게 되어 얼마나 황홀하고 놀랐는지요. 너무 어려서 말을 못하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가르멜 수녀들이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께서 지으신 성가를 불러 주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제 마음에 아늑한 위로를 주었습니다. 언제나 애정으로 저를 감싸 주시던, 어머니의 마음처럼 따뜻한 마음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그날 눈물에 젖어 감사를 드리고, 자정미사 후 집에 돌아온 셀린 언니가 저를 놀라게 했던 일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제가 방에 들어가 보니 예쁜 대야가 있고 안에 ‘작은’ 배가 눈에 띄었는데, 옆에 조그만 공을 놓고 잠들어 계신 어린 예수님을 싣고 있었습니다. 배의 흰 돛에는 셀린 언니가 써놓은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아가 5,2) 하는 말씀이 있었고, 배에는 ‘체념!’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 정말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약혼녀에게 아직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성스러운 눈을 감고 계셨지만, 당신 마음의 섬세함과 사랑을 이해하는 다른 영혼을 통해서 당신을 약혼녀에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1888년 새해의 첫날, 예수님께서는 선물로 십자가를 하나 더 보내셨는데, 이번에는 저만이 홀로 져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 십자가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만큼 더 괴로웠습니다……. 곤자가의 마리아 수녀님 말씀이 주교님의 회답을 12월 28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에 받았는데, 그러나 저를 ‘40일의 사순 시기’가 지난 다음에야 가르멜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알리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시련은 아주 독특한 성질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세상과 저와의 인연은 끊어졌는데, 거룩한 방주는 가엾은 비둘기를 거두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 달 동안의 귀양살이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지 못하는 제가 참을성이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제가 느끼는 고통은 무척 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체념과 그 밖에 여러 덕행을 실행하도록 저를 많이 키워 준 고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영혼이 그토록 다양한 은총을 받았던 이 세 달이 어떻게 지났겠습니까……? 처음에는 지금껏 해 오던 것보다 좀 규율이 느슨한 생활을 하며 편하게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금세 제게 주신 이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닫고, 보통 때보다도 더 ‘착실하고 극기하는’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극기라고 한 것은 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고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고행을 하시는 훌륭한 분들과는 다르게 고행에 대해서는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마 제 변변치 못한 마음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셀린 언니처럼 수천 가지 고행을 해서 괴로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저는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귀여움을 받으면서, 아무런 고행도 할 필요가 없는 작은 새처럼 보살핌 받았던 것입니다. 제가 하는 극기라는 것은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생각을 접고, 말대꾸를 하지 않으며, 남몰래 선행을 베풀고, 앉을 때 등을 기대지 않는 등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작은 일들을 하면서 예수님의 약혼자가 될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즐거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세 달이 꿈결같이 지나고,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날이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