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되려 하였으나 거절당한 두 사람

수도자가 되려...

수도자가 되려 하였으나 거절당한 두 사람, 35세의 시계 기술자와 27세의 레이스 제작자는 만나게 되었고, 짧은 약혼 기간을 거쳐 1858년 7월 13일 알랑송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퐁뇌프 가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처음 열 달 동안은 오누이처럼 지냈다(루이 마르탱이 먼저 제안했고, 젤리 게랭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다 고해 신부의 충고를 듣고 부부는 생각을 바꿨고, 1860년부터 1873년까지 이 가정에서 아홉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난 아이들이 좋아요. 아이를 낳으려고 세상에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에요. 하지만 이제 곧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겠죠. 이번 달 23일에는 마흔한 살이 되니까요. 이제는 할머니 소리 들을 나이죠!” 막내인 데레사가 태어나기 일 년 전쯤 젤리 게랭이 쓴 글이다.

그러나 아홉 아이 중에 다섯 명의 딸아이만 살아남았다. 당시에는 영아나 어린이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이런 와중에 1876년에 와서 말기 유방암으로 판정이 난 병마의 그림자로 마르탱 부인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몸이 쇠약해지니 할 수 없이 다섯째 아이부터는 그런대로 믿을 만한 유모를 물색해 맡겼다. 이 가정에서는 15년에 걸쳐 아이가 출생하고 사망하는 일이 계속됐다. 가족들은 사내아이 둘, 여자아이 둘이 그들의 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중에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던 다섯 살짜리 엘렌도 있었다. 이에 대해 마르탱 부인은 이렇게 썼다. “그 아이를 떠나보낸 뒤로 그 애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는 아직도 내가 필요해요. 그 아이들 때문에 저는 하느님께 몇 년이라도 더 이 세상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내 곁을 떠나간 두 사내아이도 많이 그립지만, 엘렌을 잃은 슬픔이 더욱 큰 것 같아요.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아이,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영리했던 아이였어요. 요즘도 그 아이 생각이 한순간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요.”

1870년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터지고 그로 인해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프로이센 병사 아홉 명이 이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부인의 부단한 고생으로 가족도 늘고 사업도 점점 더 번창하여 마르탱 가족은 어느덧 중산층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마르탱 씨는 시계 일을 그만두고 아내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부부가 밤잠을 잊고 부지런히 일하였다. 이 시기에 생블레즈 가로 이사를 했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데레사 성녀의 집이 바로 이곳이다.

마르탱 부부는 가정 생활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가족이 행복한 때는 오직 함께 있을 때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큰딸 마리, 늘 발랄하고 쾌활하며 어머니와 가장 친하고 어머니에게 믿을 만한 말 상대가 되어 주던 둘째 딸 폴린, 이 둘은 르망에 있는 성모 방문 수녀회의 기숙 학교로 떠난다. 두 아이는 이모인 도지테 수녀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한 학교생활을 했다. 이모는 아이들의 행동이나 학교 성적에 관한 소식을 집으로 전해 주면서 둘이 성격이나 기질이 정말 다르다고 신기해했다. 방학을 맞아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온 집안이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방학이 끝나 학교로 돌아가는 날에는 집안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별다른 재능이 없고 자주 잔병치레를 해서 ‘안쓰러운 레오니’가 어머니의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데레사 바로 위의 언니 셀린은 씩씩하고 ‘당찬’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데레사와 가장 각별한 사이였던 셀린은 데레사에게 평생의 동반자 같은 언니였다.

교외 별장으로 혹은 노르망디의 시골길을 산책하며 걷던 일, 시골의 스말레 마을로 갔던 거며, 리지외로 약국을 경영하는 외삼촌 댁에 갔던 것, 기차를 타고 르망에 가서 이모 수녀를 만나고……. 이 모든 것들이 마르탱 아이들의 인상에 남았고 아이들은 이런 소박하지만 행복한 순간들을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했다. 1859년부터 1870년까지 장례식을 일곱 차례나 − 조부모님 세 분과 네 명의 아이들 − 치렀지만 가족들의 끈끈한 정은 더욱 깊어갔다.

아버지는 원래 깐깐하고 엄격한 사람이었고 조용한 것을 좋아했기에 다자녀 가정의 시끌벅적함이 성가실 수도 있었을 텐데, 가족들에게 항상 관대하고 다정하게 대했다. 밤이면 아버지는 모여 있는 가족을 위해 당시 저명한 작가들 곧 낭만주의파 시인들의 시를 읽어 주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옛날 노래를 불러 주며, 또 아주 조그맣게 모형 장난감을 만들어내 아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어머니는 몸이 계속 약해져 앞날을 걱정하면서도 항상 씩씩한 모습으로 가정을 이끌어서, 그녀의 언니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용기를 가진, 정말이지 강인한 여자였어! 시련이 닥쳐도 굴복하지 않았고, 부자가 됐다고 거만하게 굴지도 않았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현실적인 그녀는 쾌활하고 솔직했으며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을 겸비해 가정의 영혼 같은 존재였다.

이 가정에는 신앙심이 충만했다.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찾고, 가족 기도, 아침 미사, 영성체 — 얀세니즘이 위세를 떨치던 당시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 주일의 저녁 기도, 피정 등으로 늘 하느님을 공경했다. 전례 행사, 순례, 단식과 금육을 철저히 지키는 등 일상생활은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허례허식과는 거리가 먼 이 가족에게 과장됨이나 편협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신앙심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부모에게 버림받아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 부랑자, 가난한 노인들을 거두어 먹였다. 마르탱 부인은 밤잠을 설쳐 가며 병든 하녀를 돌보았고, 마르탱 씨는 사재를 털어 가난한 사람, 간질 환자와 임종 환자를 도왔다. 자녀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그들의 인격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머니는 딸들이 옷을 예쁘게 입는 것을 좋아했다. 큰딸 마리가 열여섯 살 때 또래 소녀들과 잘 어울려 다닌다고 언니인 마리 도지테 수녀가 듣고 신경쓰더라고 하자 마르탱 부인은 이렇게 반응했다. “그럼, 다 큰 애를 수도원에 가둬 놓아야 할까? 사람이 세상에서 격리된 것처럼 살아갈 순 없잖아! 그 ‘성 처자’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필요는 없어.”